모든 혁명은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다른 혁명의 모델이 되었던 프랑스 혁명.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의 성공은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희망이 없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어떻게 진행되고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발단
- 삼부회 개최
- 국민의회 공표
- 바스티유 감옥 습격
- 루이 16세의 도주
1. 발단
1685년 10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는 모든 위그노(Huguenots), 즉 개신교 학교와 교회들을 닫으라는 칙령을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으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칙령에 프랑스의 개신교 국민들은 크게 반발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개신교 탄압으로 위그노들은 프랑스를 떠나 유럽 다른 나라들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았던 재산도 함께 말입니다.
또한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매우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의 공사로 프랑스는 또 엄청난 돈을 써버리게 됩니다.
새로 완성된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족과 성직자들, 귀족들은 날마다 호화로운 무도회를 벌이며 나라 상황이 어떻게 되든 흥청망청 놀고먹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겹치고 겹쳐 프랑스는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14세의 뒤이은 루이 15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의 재정은 매우 가난해졌습니다.
같은 시기, 1770년대 북미 대륙에서는 미국의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미국은 필사적으로 영국과 맞서 싸우고 있었지만 영국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에, 프랑스에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어 누구를 도울 처지가 아니었지만 영국을 골탕 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당연히 프랑스는 미국을 돕게 됩니다.
프랑스가 도와준 덕분에 미국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선대 왕들이 루이 16세에게 남긴 것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였고, 가뭄까지 닥친 탓에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세금 개혁을 하지 않고는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세금을 걷으려는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와 귀족들이 순순히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을 리가 없기에 당연히 반발이 일어납니다.
2. 삼부회 개최
이러한 배경 하에서 각 계층의 대표들이 모여 세금 개혁을 합의해 보자는 뜻에서 1614년 이래로 175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부회란 무엇일까요?
당시 프랑스에는 세 개의 신분이 있었습니다.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이란 바로 이 세 개의 신분으로 이루어진 사회 체제, 즉 구체제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1 신분은 약 13만 명 정도의 성직자로, 가장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2 신분은 귀족으로, 약 35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주요 관직들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3 신분은 평민이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전체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프랑스인의 대부분은 평민이었습니다.
평민은 세금 등 온갖 의무를 지고 있었지만 항상 궁핍하게 살아야만 했었던 반면, 성직자와 귀족들은 놀고먹기만 했으니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부회가 열릴 당시, 프랑스 사회는 계층 간 불평등이 극에 달해있었습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소집되었고 이 세 신분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투표에서 가장 큰 쟁점은 역시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도 세금을 걷어야 할까?라는 주제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1 신분과 2 신분은 해괴한 투표 방식을 들고 나오는데 바로 각 신분별로 1표씩만 투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1 신분과 2 신분이 같은 편이니 두 표가 되고 3 신분은 한 표로, 3 신분이 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1신분과 2 신분이 세금을 내기 싫어서 짜고 치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이었습니다. 인구는 3신분이 수십 배 많은데 3 신분을 통틀어 한 표만 투표할 수 있기에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3 신분은 신분별이 아닌, 인구 수별, 머릿수별 투표 방식을 주장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3신분은 삼부회 불참을 선언하였습니다.
3. 국민의회 공표
3 신분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국민의 대표기관 즉 국민의회라고 공표하였습니다.
곧이어 삼부회 회의장이 폐쇄되자 국민의회는 테니스 코트로 자리를 옮겨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789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 서약]이 발표된 배경입니다.
왕과 1 신분, 2 신분들은 국민의회를 해산시키려고 군대를 보내려 하였습니다. 이어 왕당파가 군대를 보내려 한다는 소식은 즉시 국민들에게 퍼져나가게 됩니다.
결국 국민들은 왕당파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평민이었으므로 무기를 구하기 위해 무기고를 습격해야만 했으니 요새를 개조해 만들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그 목표가 되었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오랜 시간 동안 전제 왕권과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성난 군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습니다.
4.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프랑스 혁명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각지에서는 봉건제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목소리에 맞춰 1789년 8월 4일, 프랑스에서는 봉건제와 모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된 바 있었는데
드디어 1789년 8월 26일에는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에 따라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선언으로 인하여 구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과 귀족들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왕은 사실상 입헌 군주로서 국민 의회의 사회 개혁 작업을 두려움에 떨며 바라만 봐야 했습니다.
5. 루이 16세의 도주
혁명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자 왕은 해외로 도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야 맙니다. 도피처로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정해집니다.
마차는 오스트리아 쪽으로 달리다가 국경지역인 바렌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왕이 너무 늦장을 부렸던 탓에 이미 국경지역에는 왕이 도주했다는 소식이 파다했고 경비가 강화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우체국장이 왕을 알아보면서 왕과 왕비의 도주 작전은 결국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루이 16세는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다 다시 파리로 끌려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민들은 국가를 배신한 왕과 왕비에게 더 큰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 2편에 계속됩니다 -
[세계사] - 프랑스 혁명의 원인 및 요약 정리! (프랑스 혁명 시리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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